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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연구윤리, 죄의식도 법도 없는 성역을 박살 내자

발행일자
2022/09/21
성격
성명
작성자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는 대학원 내의 다양한 사람들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도매금으로 넘겨진다. 쑥대밭을 만들고도 쑥대밭이 아니라고, 쑥대밭이라는 건 애당초 없다고, 태연하게 말을 뱉으며 그 쑥대밭으로 부와 명예를 축적하고자 한 사람들 때문이다. 이번 정권을 둘러싸고 단기간 내 연쇄적으로 밝혀진 연구 부정행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어가던 연구윤리 의식을 단번에 퇴화시켰으며, 온갖 종류의 반칙과 불법을 ‘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이를 통한 계급재생산을 꾀함으로써, 윤리적 감각이 마비된 성역을 창출해냈다. 내로남불의 성역, 후안무치의 성역이다. 어떻게 이 사태를 두고만 볼 수 있나.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경우, 2007년 국내 KCI 등재학술지인 『한국디자인포럼』에 발표한 두 편의 학술지 논문과 2008년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 ‘애니타’ 개발과 시장적용을 중심으로」를 비롯, 그의 모든 경력의 근거가 된 1999년 숙명여대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논문 「파울 클레의 회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까지, 제출된 모든 논문이 극단적 수준의 표절 논문이라는 사실이 다각도로 입증되었다. 9월 6일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의혹 검증을 위한 범학계 국민검증단 대국민 보고회’에 따르면, “이론의 여지 없이 모든 논문이 표절의 집합체”이며, 김건희는 “점집 홈페이지와 사주팔자 블로그, ‘해피캠퍼스’와 같은 지식거래 사이트”도 출처 표기 없이 무단으로 사용했다. ‘표절’이라는 표현마저 저어되는, 복사와 붙여넣기의 향연이었다. 석사학위논문 표절 의심 비율 42%(<JTBC>, 2021.12.27.), 또 다른 학술지 논문의 카피킬러 검증 표절률 43%, 어떤 학술지 논문의 영문초록은 타 저자의 석사학위논문과 94% 일치…가공할 수치들이었다. 치밀한 ‘기교’ 조차 없는 낯두꺼운 도둑질이었다.
그런데 점입가경으로 국민대가 놀랄 만한 대응을 해왔다. 2021년 7월 7일 연구부정 의혹 조사에 착수한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동년 9월 검증 시효가 지났으므로 조사하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표절 피해자인 숙명여대 구연상 교수의 말마따나 “국민대가 도둑질을 방치”한 가운데, 국민대의 연구논문 시효 폐지가 이미 시행되었음을 교육부가 지적했고, 뒤따라 국민대 졸업생 200명이 졸업장을 반납하는 등 각계에서 항의가 빗발치자 11월 재조사위를 구성했다. 하지만 올해 8월 국민대가 내놓은 건 ‘대상 논문 4편 중 3편은 연구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고 다른 한 편은 학회 기준을 알 수 없어 검증 불가’라는 결론이었다. 재조사위 최종 보고서는 물론, 회의록이나 명단도 공개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국민대 교수회 회원 77.3%가 참여한 온라인 투표의 결과는 교수회의 자체적 검증에 대한 강한 반대의 목소리였다. 타인의 저작물을 출처 표기 없이 베끼면 ‘표절’이라는 간명한 사실을 국민대가 몰랐을 리 없다. 국민대의 굴욕적 결정은 김건희의 논문을 위법이 아닌 ‘정상’의 결과물로 승인했고, 그 결과 공동의 윤리 감각을 업신여겼다. 국민대는 김건희의 논문을 철저하게 재조사하고 논문 취소 및 학위 반납의 조치를 취하라! 국민대 교수회는 권력과 야합한 비굴한 결정을 당장 철회하고 엄정한 논문 검증에 임하라!
현 법무부 장관인 한동훈의 고등학생 자녀는 게재료만 내면 별도의 심사 없이 논문을 게재해 주는, 학계에서 투고가 금지된 약탈적 학술지(predatory journal)에 다섯 편의 논문을 게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런데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이는 개인의 일회적인 위법 행위가 아니다. 한동훈의 딸과 처조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산호세 허위스펙 네트워크”는 교활한 표절, 데이터 조작, 저작권 위반 등을 통해 입신출세용 지름길을 만들어냈다(<뉴스타파>, 「조작으로 쌓아 올린 한동훈 처가의 ‘아이비 캐슬’」, 2022.07.07.). 취임 34일 만에 사퇴한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 논문을 중복게재하여 성과를 부풀렸다는 의혹을 받았다. 현 여성가족부 장관인 김현숙은 정부출연 연구기관 재직 당시 공동 저자로 참여한 연구 보고서를 출처 없이 베껴 논문을 만들고, 이를 다시 학술지에 게재하는 ‘부당한 중복게재’를 했음이 드러났다. 2000년대 중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중복 게재가 공론화되며 보다 엄정한 연구윤리 제정 움직임이 일어나던 시기의 일이었다. 최근 정무1비서관에 임명된 전희경 전 자유한국당 의원은 과거 제출했던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이 92%의 복사 표절로 이뤄진 “역사상 최악의 표절 논문”이라 규탄받은 바 있다.
이 일련의 사태는 만연해있던 기존의 구조적 문제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연구윤리에 관한 학계 내부의 성찰과 비판, 제도의 마련을 포함하여 정책적 기조의 측면에서도 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터였다. 한데 일말의 죄의식 없는 극단적 표절과 표절 사실에 대한 극단적 은폐 속에서 그간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고 학술성과물은 한낮 학력주의에 봉사하는 입신출세의 도구가 되었다. 자신만의 언어가 한 줌도 없는 자들이, 입으론 ‘경쟁력’ 운운하며 정작 본인들은 남의 글을 훔쳐 출세를 꿈꾼 셈이다. 게다 권력과 일체화된 ‘연구 부정의 성역’은 죄라는 것 자체를 없애버렸다. 마치 원래 논문이란 게 표절도 하고 짜깁기도 하고 대필도 하는 것 아니냐고. 기득권층이 그렇게 학위를 받아 스펙을 쌓고 임용이 되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냐고 말하는 듯하다. 한동훈은 과거에 “공정한 척이라도 하고 공정해 보이게라도 해야”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웬걸 지금의 그는 ‘척하는 삶’조차 살지 못하는 것 같다. 죄를 짓고는 스스로, 멋대로 그 죄를 사하여 준 셈이다.
대학과 대학원은 ‘순수’학문만을 위한 신성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이 모여있는 혼종의 공간이다. 젊은 전일제 학생들만이 기거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항구적인 알력 관계들이 있지만 그렇게 형성된 대학원의 규모가 역설적으로 연구자들의 삶을 유지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의 밑바탕이자 기준이 되는, 공통상식으로서의 연구윤리는 더더욱 중시되어야만 한다. 대학원생노동조합은 학계의 합의된 약속을 파기하고 연구윤리 및 학술주권을 침탈한 최근 일련의 사태를 결단코 좌시할 수 없다. ‘되니까’ 계속하는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우리는 도덕적 퇴폐로 이어지는 그 길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몫에 예의를 다할 것이다.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